밤이 깊었다
물시계 소리뿐이다
다들 물러가라
낮에는 천 명이 내 앞에 엎드려
밤에는 아무도 내 얼굴을 못 봐
상소문은 쌓이고 나는 다 읽었어
종로 뒷골목 왈패 이름까지 알아
누가 뇌물을 받고 누가 집을 팔았는지
어느 댁 계집종이 말을 파는지
무당이 누구 사주를 품에 넣었는지
다 들어와, 이 방까지, 다 들어와
붓을 들면 목이 하나 떨어지고
붓을 놓으면 열이 굶어 죽어
그래서 나는 오늘도 붓을 안 들어
모르는 척하는 것도 나라를 다스리는 일
하늘이 내린 자리라 하네
근데 하늘은 말이 없네
내가 아는 걸 다 말하면
이 나라는 하룻밤에 무너져
그래서 나는 — 듣기만 해
그래서 나는 — 모른 척해
망나니가 술 세 잔을 마시고 칼을 든다지
그 종이에 찍힌 도장은 내 것이야
밤길로 도망간 놈도 내 백성이고
그놈을 쫓는 놈도 내 백성이야
용상은 넓은데 앉을 자리는 좁아
금관은 무거운데 머리는 비어 가
어릴 땐 임금이 되면 다 바꿀 줄 알았지
바꿀 수 있는 건 — 내 밤잠뿐이더라
나를 위해 종로에서 취타가 울려
담 너머로 들려, 저 나팔 소리
저 소리 안에 내 백성이 다 있어
저 소리가 들리는 한 나는 안 나가
사또가 묻더라, 어찌 하오리까
나는 대답했지 — 알아서 하라
그 말 한마디가 내 평생 가장 긴 말
하늘이 내린 자리라 하네
근데 하늘은 말이 없네
내가 아는 걸 다 말하면
이 나라는 하룻밤에 무너져
그래서 나는 — 듣기만 해
그래서 나는 — 모른 척해
그래서 나는 — 왕이야
물시계가 멈췄다
날이 밝는다
다시 모르는 척할 시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