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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장: 광대 · TRACK 1

제자리

IN ITS PLACE

앨범 0장: 광대 · 1번 트랙  ·  탈쇠 인물 소개 →

탈을 쓰기 전, 그는 아버지 곁에서 반듯하게 글씨를 배우던 양반의 아들이었다. 어느 저녁, 베껴 쓰라며 받은 관청 문서들. 이름도 다르고 삶도 다른데, 죄는 모두 같았다.

먹은 너무 진하지 않게
붓은 너무 눕히지 않게
소매 끝은 종이에 닿지 않게
아버지는 늘 말했다
"반듯하게."

새벽이면 문이 열리고
사람들이 아버지를 기다렸다
비단 옷깃
검은 사모
낮은 목소리
빠른 걸음
나는 그 뒤를 따라가며
걸음까지 닮아 보았다
집안 어른들은 웃었다
"저 아이도 곧 벼슬하겠구나."
그 말이 좋았다
나는 이미
내 자리가 어디인지
안다고 믿었다

한 획은 길지 않게
한 획은 짧지 않게
먹이 번지면 다시 쓰고
글자가 기울면 다시 쓰고
아버지는 말했다
"글씨를 보면
사람을 안다."

반듯하게
선을 맞춰
반듯하게
이름을 써
흐트러지면
다시 고쳐
종이 위에선
모든 것이
제자리를 찾는다

나는 사람 이름을 외웠다
누가 어느 집안인지
누가 누구 편인지
어디에서 말을 줄이고
누구 앞에서 먼저 웃는지
누가 가르치지 않아도
보다 보면 알게 됐다
밥상에서도
마루에서도
손님이 떠난 뒤에도
사람들은 이름보다 먼저
집안을 물었다
그게 당연했다
내게도
돌아갈 성이 있었으니까

성 하나
이름 둘
붓끝 아래 가지런히
아버지의 것
할아버지의 것
언젠가는
내 것이 될 자리

그날 저녁
아버지가 서류를 가져왔다
"이것도 베껴 보아라."
나는 기뻐서
자리를 고쳐 앉아
첫 장부터 붓을 들었다
첫 장에는
모르는 이름
둘째 장에도
모르는 이름
셋째 장에서
손이 멈췄다
방금 전 문장과
똑같았다

첫 장
둘째 장
셋째 장
이름만 달랐다

사는 곳도 다르고
벼슬도 다르고
나이도 다른데
적힌 죄는
한 글자도 다르지 않았다
나는 아버지를 보았다
"이 사람들은
서로 아는 사이입니까?"
대답이 없었다
잠시 뒤
붓이 다시 움직였다
나는 또 물었다
"그런데 어찌
죄가 모두 같습니까?"

반듯하게
선을 맞춰
반듯하게
이름을 써
흐트러지면
다시 고쳐
종이 위에선
종이 위에선…

아버지가 내 종이를 보았다
한참 뒤
틀린 글자 하나를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여기."
나는 고쳐 썼다
아버지가 말했다
"그래."
"반듯하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