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 뜨기 전에
물지게를 지고
우물로 간다
오늘도
종로 뒷골목 끝, 우물 하나
새벽마다 그 애가 먼저 와 있어
두레박 내리는 소리, 물 긷는 소리
나는 뒤에 서서 내 차례를 기다려
댕기 끝이 젖어 있고 손이 빨개
물동이 이고 가는 뒷모습만 봐
한 마디만 하면 되는데, 한 마디만
입 안에서 돌다가 물에 빠져
봄엔 꽃잎이 두레박에 떠 있었고
여름엔 그 애 이마에 땀이 맺혔고
가을엔 낙엽이 물 위를 덮었고
겨울엔 둘이서 얼음을 깼어, 말없이
우물가에 서면
물보다 깊은 게 있어
이름도 못 묻고
한 해가 지나가
두레박 올리면
내 얼굴만 떠 있어
그 애는 가고
물은 그대로야
오늘은 그 애가 안 왔어
내일도, 그다음 날도
옆집 아낙이 물 긷다 말해
"그 집 딸 시집갔다더라, 강 건너로"
나는 두레박을 내렸어
평소처럼, 아무 일 없는 것처럼
물이 차갑다, 어제랑 똑같이
근데 왜 손이 떨리냐
한 마디만 했으면 달라졌을까
아니, 천민 놈 말 한마디에 뭐가 달라져
그냥 매일 아침 그 뒷모습 하나로
한 해를 살았으면 됐지, 됐지
그 애 이름을 몰라
물어볼 걸 그랬나
아니
모르는 게 나아
그래야 못 부르니까
우물가에 서면
물보다 깊은 게 있어
이름도 못 묻고
한 해가 지나가
두레박 올리면
내 얼굴만 떠 있어
그 애는 가고
물은 그대로야
해 뜨기 전에
우물로 간다
오늘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