푸른 물길 끝을 따라
지도에도 없는 골목
유리 안개 걷힌 자리
모르는 계절이 숨을 쉰다
낡은 처마 아래 작은 장터
이름 없는 사람들이 모여
팔지 않는 것을 나누고 있어
살지 않은 날의 이야기
아이 하나 눈을 감고 말해
여긴 눈이 내린 적 없는데
하얀 아침 발자국 소리
나는 분명 기억한다고
늙은 여인은 웃으며 말해
낳은 적 없는 아이의 이름
한 번도 안아 본 적 없는데
아직도 품이 따뜻하다고
없는 사람, 없던 날들
왜 이렇게 선명한 걸까
기록에는 남지 않았는데
모두 같은 표정으로 그리워해
없는 계절이 여기 살아
오지 않은 봄이 피어나
가 본 적 없는 길 끝에서
누군가 나를 기다려
겪지 않은 밤이 그리워
모르는 바람이 익숙해
거짓이라 부를 수 없는
없는 계절이 여기 살아
젊은 남자는 찻잔을 놓고
처음 본 여자를 기억해
만난 적 없는 그 사람과
비 오는 여름을 살았대
두 사람은 서로 모르는 채
같은 노래 한 줄을 흥얼거려
누가 먼저 배운 적도 없는데
끝의 음까지 똑같이 내려
나는 조용히 그들을 보다가
문득 젖은 솔 냄새를 맡아
이곳엔 소나무도 없는데
가슴이 먼저 기억해 내
낯선 냄새, 익숙한 온기
머리보다 몸이 먼저 알아
한 번도 와 본 적 없는 곳을
왜 나는 돌아온 듯 바라봐
없는 계절이 여기 살아
오지 않은 봄이 피어나
가 본 적 없는 길 끝에서
누군가 나를 기다려
겪지 않은 밤이 그리워
모르는 바람이 익숙해
거짓이라 부를 수 없는
없는 계절이 여기 살아
날짜를 대 봐, 기록은 없어
좌표를 대 봐, 지도엔 없어
증거를 대 봐, 아무것도 없어
그런데 왜 내 심장은 알아
측정할 수 없는 향기와 온도
등록된 적 없는 이름과 얼굴
존재하지 않았다는 한마디로
이 그리움까지 없앨 순 없어
나는 누구의 기억을 걷는지
누가 이 계절을 먼저 살았는지
시가 기억을 만든 것인지
기억이 시를 쓴 것인지
그때 바람이 한 번 불어
푸른 매듭이 손에서 떨려
눈을 감은 단 한 순간
나는 다른 곳에 서 있어
젖은 모래
겨울의 바다
소나무 냄새
그리고 한 사람
얼굴은 보이지 않는데
나는 그가 떠난 걸 알아
왜 아픈 거지
일어난 적도 없는데
왜 그리운 거지
잃은 적도 없는데
없는 계절이 내 안에 살아
오지 않은 봄이 피어나
가 본 적 없는 바닷가에
내 발자국이 남아 있어
겪지 않은 이별이 아파
모르는 이름이 목에 걸려
이제는 거짓이라 못 해
없는 계절이 내 안에 살아
푸른 새벽, 젖은 모래
눈을 뜨면 모두 사라져
그런데 손끝에 남은 향기
나는 처음으로
없던 날을 기억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