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사와 번역

빌린 계절

Borrowed Season

눈을 뜨면 낯선 아침
창문 틈에 바람이 들어
처음 보는 작은 방인데
왜 내 손은 모든 걸 알아

나무 마루 차가운 발끝
햇빛 묻은 오래된 찻잔
누가 두고 간 얇은 겉옷
나는 주인을 알고 있는 듯해

문밖에는 젖은 소나무
멀리 바다가 숨을 쉬고
한 번도 온 적 없는 이곳이
이상하게 나를 기다렸어

탁자 위에 두 사람 몫의
따뜻한 밥이 아직 남아
나는 혼자인 걸 아는데
왜 빈자리부터 바라봐

이건 누구의 아침일까
누구의 손이 문을 열었나
내 것이 아닌 하루인데
몸은 벌써 집을 기억해

빌린 계절 속을 걸어
살지 않은 날을 살아
처음 본 바다가 나를 알고
모르는 집이 나를 안아

빌린 계절 끝에 서서
없는 사람을 기다려
돌려줘야 할 기억인데
왜 나는 떠나기 싫을까

비가 오면 창을 닫고
추우면 등을 먼저 켜고
어느 서랍 몇 번째 칸에
작은 수건이 있는지도 알아

골목 끝의 낮은 담장
오래된 나무 대문 소리
생각하지 않아도 발끝이
늘 같은 길을 찾아가

그리고 어느 저녁 문득
누군가 돌아오는 발소리
얼굴조차 보이지 않는데
가슴은 먼저 이름을 알아

말하려 하면 이름은 사라져
잡으려 하면 장면은 흐려져
그런데 그가 문을 여는 순간
나는 오래 기다린 듯 울어

빌린 계절 속을 걸어
살지 않은 날을 살아
처음 본 바다가 나를 알고
모르는 집이 나를 안아

빌린 계절 끝에 서서
없는 사람을 기다려
돌려줘야 할 기억인데
왜 나는 떠나기 싫을까

기록엔 없어
날짜도 없어
내가 여기 살았다는 흔적도 없어

그런데 손은 문고릴 알고
발은 계단 수를 알고
눈은 비 오기 전의 바다를 알고
마음은 돌아올 사람을 알아

누구의 삶을 빌린 건지
누구의 겨울을 입은 건지
아니면 시 한 줄이 잠깐
살 수 있었던 세상을 만든 건지

저녁빛이 천천히 지고
그 사람이 내 앞에 멈춰

이번에도 얼굴은 없고
목소리만 아주 가까워

“늦었네”

그 한마디를 듣는 순간
나는 알았어

이별이 오고 있다는 걸

가지 마

누군지도 모르는데

가지 마

만난 적도 없는데

빌린 계절이 무너져
살지 않은 날이 멀어져
나를 알던 바다가 사라지고
따뜻한 집도 빛을 잃어

빌린 계절 끝에 서서
없는 사람을 불러 봐
돌려줘야 할 기억인데
왜 내 눈물이 먼저 날까

눈을 뜨면 푸른 새벽
내 손에는 차가운 매듭

집도
바다도
그 사람도 없는데

나는 아직
돌아가고 싶어

기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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