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무것도 없는 줄 알았어
하얀 종이만 남은 줄 알았어
그런데 빛을 비추자
한 줄이 떠올라
한 페이지
한 문장
그 아래
아무것도 없어
누가 지운 것도 아니고
누가 가져간 것도 아냐
처음부터
비워 둔 자리였어
나는 오래 바라보다
조심스럽게 읽어
“비가 오지 않은 여름에도
누군가는 젖어 있었다”
그 한 줄 뒤에
내 머릿속으로
없는 골목이 생기고
없는 창문이 열리고
한 번도 만난 적 없는 사람이
천천히 돌아봐
한 줄만 남기고
모든 걸 비워 둔 이유
말하지 않은 곳에서
내 기억이 시작되게
한 줄만 남기고
다음 계절을 내게 줬어
쓰지 않은 그 빈자리에서
나는 한 생을 살아
다음 장에는
“겨울이 오기 전에
그 아이는 웃었다”
그게 전부였어
이름도 없고
얼굴도 없고
어디인지도 없어
그런데 나는 알아
어떤 웃음이었는지
나는 알아
그날의 공기까지
설명해 준 적 없는데
왜 이렇게 선명할까
또 한 장
“돌아오지 않는 사람을
기다리는 집은 늙지 않는다”
나는 읽는 걸 멈춰
이번에는
장면보다 먼저
가슴이 아파
한 줄만 남기고
모든 걸 비워 둔 이유
말하지 않은 곳에서
내 기억이 시작되게
한 줄만 남기고
다음 계절을 내게 줬어
쓰지 않은 그 빈자리에서
나는 한 생을 살아
빈칸은
없는 게 아니었어
아직 누구의 것도 아닌
가능성이었어
가장 마지막 장
다른 페이지보다
더 오래된 한지
아무 글씨도 없는 줄 알았는데
종이의 결 사이로
아주 희미하게
한 문장이 보여
“왕관을 벗은 너는
웃고 있었다”
나는 숨을 멈춰
다시 읽어
왕관을 벗은
너
한 줄만 남기고
내 앞에 문을 열어 둔 이유
내가 살지 않은 삶까지
내 안에서 숨 쉬게
한 줄만 남기고
나를 다른 나에게 줬어
아직 쓰지 않은 그 계절이
처음으로 나를 불러
나는 페이지를 덮지 않아
빈 한 장 위에
손만 올려 둬
아직은
쓰지 않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