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문 위에
종이가 붙었다
집은
나라의 것이 되었다
책은 마당에 쌓였다
붓은 부러졌다
벼루는 누가 들고 갔다
어머니의 비녀
할아버지의 족자
내 이름이 적힌 책
하나씩
다른 사람의 손으로
식구들은 흩어졌다
아버지는
돌아오지 않았다
나는 나이가 어려
목숨만 남았다
목숨만
남았다
이름도
남았다
그게
더 무거웠다
역적의 아들
역적의 아들
허리를 굽혀라
허리를 굽혀라
역적의 아들
역적의 아들
고개를 숙여라
고개를 숙여라
배운 것은 잊어라
여기선 쓸 데 없다
새벽보다 먼저 일어나
물을 긷고
장작을 패고
마당을 쓸었다
손바닥이 갈라졌다
붓을 쥐던 손
누가 부르면
"예."
누가 때리면
"예."
말을 가려 쓰던 입으로
"예" 한 마디만
글을 안다는 것은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았다
어떤 밤은
아버지가 미웠다
그 사람 이름 위에
붓을 댄 손
어떤 밤은
그 손이 그리웠다
내 틀린 글자를
짚어 주던 손
미움과 그리움이
한 이불 아래 누웠다
그 집에 손님이 든 날
술이 돌고
누가 나를 가리켰다
"저놈이 누구 아들인지 아느냐."
웃음이 터졌다
"네 아비가 어떻게 걸었는지
한번 보여 보아라."
나는 가만히 서 있었다
"못 하겠느냐?"
발길이 날아왔다
나는 허리를 폈다
턱을 조금 들고
소매를 가다듬고
천천히
한 걸음
또 한 걸음
반듯하게—
나는 멈추지 않았다
아버지의 헛기침
대감들의 눈짓
낮은 목소리로 사람을 부르는 법
먼저 웃어야 할 사람 앞에서
먼저 웃는 법
역적의 아들
한 번 더
역적의 아들
한 번 더
(crowd chanting and laughing) 한 번 더!
모두가 웃었다
나는 웃지 않았다
그런데
하나도
틀리지 않았다
너무
잘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