밤에 궁궐은 넓어진다.
낮에는 사람이 있어 좁던 회랑이, 인시가 지나면 끝이 보이지 않는다. 왕은 그 회랑을 걷는다. 내관 하나가 등불을 들고 세 걸음 뒤를 따르지만 왕은 등불이 필요하지 않다. 이 길은 눈을 감고도 걷는다. 아버지가 걸었고 그 아버지가 걸었고 그 앞의 열두 왕이 걸었던 길이다. 돌 하나하나가 발바닥에 익다.
그 길 끝에 문이 하나 있다. 왕은 그 앞에서 걸음을 멈춘다.
"전하."
내관의 목소리가 조심스럽다. 왕은 대답하지 않는다.
문 안은 비어 있다. 왕은 그것을 안다. 석 달째 알고 있다. 그런데도 밤마다 이 길 끝까지 걸어와 문 앞에 선다. 손을 대지는 않는다. 손을 대면 안이 비어 있다는 것이 손끝으로 확인되기 때문이다. 서 있기만 하면, 잠시는, 안에 누가 있는 것 같다.
"전하, 바람이 찹니다."
"바람이 차구나."
왕이 그렇게 말하고 돌아선다. 회랑을 되짚어 걷는다. 등불이 세 걸음 뒤에서 따라온다. 그림자가 앞으로 길게 눕는다. 왕은 자기 그림자를 밟으며 걷는다.
그 여자를 처음 본 것은 열아홉 살, 아직 세자였을 때였다.
경회루 뒤편에 그릇을 나르는 나인이 있었다. 왕은 그 여자가 그릇을 떨어뜨리는 것을 보았다. 사기 그릇이 돌바닥에서 깨졌고, 파편이 사방으로 튀었고, 여자는 무릎을 꿇고 그것을 줍기 시작했다. 그때 왕이 보았던 것은 여자의 얼굴이 아니라 손이었다. 조각을 하나하나 줍는데, 순서가 있었다. 큰 것부터 줍지 않고, 가장 날카로운 것부터 주웠다. 다음 사람이 밟지 않게.
왕은 그 자리에 한참 서 있었다.
여자의 이름은 연이라 했다. 아비는 없고 어미는 아산의 관비였다. 그런 사람이 궁에 들어오는 길은 하나뿐이고, 궁에서 올라갈 수 있는 자리도 정해져 있다. 연이는 평생 그릇을 나르다 늙어 나갈 사람이었다.
세자가 그 여자를 부른 것은 그해 가을이었다.
"네 이름이 무엇이냐."
"연이라 하옵니다."
"글은 아느냐."
"모르옵니다."
"무엇을 할 줄 아느냐."
여자가 잠시 생각하더니 답했다.
"그릇을 나릅니다."
세자가 웃었다. 궁에 들어온 뒤로 처음 웃은 것 같았다.
왕이 되던 해에 왕은 연이를 궁 안 깊은 곳으로 들였다.
첩지도 없었고 품계도 없었다. 대비는 그 일을 알고도 한 달을 말이 없다가, 어느 아침 왕을 불러 이렇게만 물었다.
"전하, 나라의 어미가 될 사람이옵니까."
"아니옵니다."
"그러면 무엇이옵니까."
왕은 답하지 않았다. 답할 말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 여자는 아무것도 아니었다. 왕비도 아니고 후궁도 아니고 이름을 올릴 자리도 없었다. 다만 왕이 하루에 한 번, 아무에게도 하지 못하는 말을 하는 사람이었다.
정사가 끝나고 밤이 되면 왕은 그 방으로 갔다. 연이는 늘 그 자리에 앉아 있었다. 왕이 그날 있었던 일을 말하면 연이는 듣기만 했다. 조언하지 않았고 편들지 않았다. 다만 가끔, 아주 가끔, 왕이 말을 마치면 이렇게 물었다.
"그 사람은 무엇이 무서웠을까요."
왕은 그 물음을 좋아했다. 대신들과 하루 종일 논한 일이, 그 여자의 한 마디에 다르게 보이는 밤이 있었다.
한 번은 왕이 이렇게 말했다.
"네게 첩지를 내리겠다."
연이가 고개를 저었다.
"이름이 생기면 사람들이 저를 보옵니다."
"보면 어떠하냐."
"보이면 지울 수 있사옵니다."
왕은 그 말을 웃어넘겼다. 그때는 웃어넘겼다.
궁궐에서 사람을 없애는 데는 칼이 들지 않는다.
그해 봄부터 소문이 돌았다. 관비의 딸이 왕의 총명을 흐린다는 소문이었다. 소문은 저잣거리에서 시작해 육조로 올라갔고, 육조에서 상소가 되었고, 상소가 열 장이 되었을 때는 이미 소문이 아니라 사실이 되어 있었다. 종이에 적히면 사실이 된다. 왕은 그것을 그때 배웠다.
여름에 연이가 앓았다.
어의가 들었다. 탕약이 들어갔다. 사흘째 되는 밤, 왕이 그 방에 들었을 때 연이는 이미 말을 못 했다. 눈은 뜨고 있었다. 왕을 보고 있었다. 왕이 손을 잡자 손이 차가웠다.
"약을 다시 지어라."
어의가 엎드렸다.
"전하, 이미—"
"약을 다시 지으라 하였다."
새벽에 연이가 갔다.
기록에는 병사로 올랐다. 승정원일기에도 병사라 적혔다. 그 여자에게는 첩지가 없었으므로 장례도 없었다. 궁 밖으로 나가는 상여 하나가 있었을 뿐이고, 그 상여를 따라간 사람은 늙은 나인 둘이었다.
왕은 그 뒤로 옥좌에 오래 앉아 있는 버릇이 생겼다.
정사가 끝나고 대신들이 물러가도 일어나지 않았다. 내관이 등불을 갈러 들어왔다 나가고, 다시 들어왔다 나가도 그 자리에 있었다. 옆자리를 보고 있었다. 그 자리에는 아무도 앉은 적이 없었다. 왕비의 자리였고, 연이는 왕비가 아니었다. 그런데도 왕은 그 자리를 보았다.
겨울에 눈이 왔다.
왕이 회랑에 나와 눈을 보았다. 마당이 희게 덮이고 지붕이 덮이고 담이 덮였다. 왕은 오래 서서 그것을 보다가, 문득 이상한 생각을 했다.
눈은 모든 것을 덮는데, 왜 그 자리만은 덮이지 않는가.
물론 마당에는 그런 자리가 없었다. 눈은 고르게 내렸다. 자리는 왕의 안에 있었다.
그 겨울부터 왕은 잠을 자지 못했다.
그리고 왕은 그 여자를 보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꿈에서였다. 꿈에서 연이는 늘 등을 돌리고 있었다. 왕이 부르면 돌아보려 하다가 깨어났다. 다음에는 물에서였다. 경회루 연못을 지나다 물에 비친 자기 얼굴 곁에 다른 얼굴이 있는 것을 보았다. 고개를 들면 아무도 없었다.
궁녀들 사이에 말이 돌았다. 밤에 처마 끝에 불빛이 떠다닌다고 했다. 도깨비불이라 했다. 어떤 나인은 그 불빛이 사람 모양이었다 했고, 어떤 나인은 여자 목소리를 들었다 했다. 나인들은 그 이름을 입에 올리지 못했다. 이름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 여자는 폐비도 아니었고 귀신도 아니었다. 기록에서 지워진 사람이었다.
왕은 그 말을 듣고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다만 그날 밤부터 빈전 앞에 향을 피우게 했다. 위패도 없는 빈전이었다. 향은 매일 밤 피워졌고, 매일 아침 다 타 있었다.
이듬해 봄, 왕이 사관을 불렀다.
"그해 여름의 기록을 가져오라."
사관이 가져왔다. 왕이 펼쳤다. 병사라 적혀 있었다. 어의의 이름이 있었고, 탕약을 지은 날짜가 있었고, 약재의 이름이 있었다. 왕은 그 약재의 이름을 오래 보았다.
"이 약재를 누가 들였느냐."
사관이 답하지 못했다.
"내의원에 물으라. 그 약재를 누가 들였고 누가 값을 치렀는지."
사흘 뒤 답이 왔다. 값을 치른 것은 내의원이 아니었다. 그 이름이 적힌 종이가 왕의 손에 들어왔을 때, 왕은 그 종이를 한참 들여다보다가 접어서 소매에 넣었다.
그날 저녁 왕은 옥좌에 앉아 내관을 불렀다.
"붓과 인주를 가져오라."
"어인 일이시옵니까."
"교서를 쓸 것이다."
내관이 붓과 옥새와 인주를 들였다. 왕은 붓을 들었다. 그리고 인주를 옆으로 밀었다.
"전하."
왕이 소매에서 종이를 꺼냈다. 이름이 적힌 종이였다. 그것을 상 위에 펴놓고, 왕은 아주 조용히 말했다.
"온화한 왕은 죽었다."
그 뒤의 일은 실록에 적혀 있다.
몇 명이 끌려갔고 몇 집이 멸했는지, 어느 대신이 어느 날에 사사되었는지, 어느 문중이 삼대에 걸쳐 지워졌는지. 사관은 그것을 적었다. 적으라 하였으므로 적었다. 그러나 왕이 사관에게 다시 쓰라 명한 대목도 있었고, 사관이 다시 쓴 대목도 있었다. 그러니 그 기록이 무엇을 말하는지는, 읽는 사람에 따라 다르다.
다만 이것은 어느 기록에도 없다.
모든 것이 끝난 밤, 궁궐이 조용해졌을 때, 왕은 다시 그 회랑을 걸었다. 내관은 따르지 않았다. 등불도 없었다. 왕은 어둠 속을 끝까지 걸어가 그 문 앞에 섰다.
이번에는 손을 댔다.
문이 열렸다. 안은 비어 있었다.
왕이 그 자리에 앉았다. 밖에서 바람이 불었다. 처마 끝에서 무언가가 흔들렸고, 왕은 고개를 들지 않았다.
"조용하구나."
왕이 말했다.
"드디어 조용하다."
그로부터 한 세대가 지난 뒤, 어느 유배지의 초가에서 한 선비가 붓을 들었다.
그가 쓰려는 것은 이 이야기가 아니었다. 그는 이 이야기를 알지 못했다. 다만 그가 살던 나라에서는 기록이 자주 고쳐졌고, 고쳐진 기록 위에서 사람이 죽었고, 죽은 사람의 이름은 남지 않았다.
그래서 그는 이렇게 썼다.
지워도 다시 쓴다.
태워도 다시 쓴다.
그 문장이 그를 죽였다.
그리고 그 문장이, 그가 죽은 뒤에도 백 년을 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