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날 아침은 그냥 아침이었다.
물때가 맞지 않아 포구에 닻을 내렸다. 쌀 두 섬과 물 한 통만 사면 되었다. 사흘이면 한양에 닿을 거리였다.
배쇠는 품 안에 손을 넣어 한 번 확인하고 뭍에 올랐다. 기름 먹인 천에 싸고 그 위에 다시 삼베로 감은 것이 거기 있었다. 십 년을 바다가 지킨 이름들이었다.
선비는 배에 남았다. 늙은 어부도 남았다. 뭍에 오르는 것은 배쇠 혼자면 되었다.
값을 흥정하고 짐을 세었다. 상인이 쌀값을 두 배로 불렀다. 배쇠가 웃으며 절반을 불렀고 상인은 웃지 않았다.
"요즘 쌀이 귀하오."
"어제도 귀했소?"
"어제는 아니었소."
그때 알았어야 했다.
부두 저쪽에서 사람들이 모였다.
모이는 모양이 좋지 않았다. 웃는 사람이 없고, 손짓이 크고, 누구도 자기 자리에 서 있지 않았다. 배쇠는 삼십 년을 그런 것을 읽으며 살았다. 사람이 모이는 모양만 보고 도망칠 때를 아는 것이 그의 일이었다.
소문은 조각으로 왔다.
북쪽이 뚫렸다 하였다.
여진이 압록을 건넜다 하였다. 강이 얼었으니 건널 것을 알았어야 했다고, 누군가 뒤늦게 말했다.
성 셋이 사흘 만에 떨어졌다 하였다.
피난민이 벌써 고개를 넘어온다 하였다. 그 말을 한 사람은 자기가 그들을 보았다고 했다. 짐도 없이 걸어오더라고 했다.
그리고 한 마디가 더 있었다.
나라에서 죄인을 사면한다 하였다.
부두가 잠깐 조용해졌다.
싸울 수 있는 놈이면 죄를 묻지 않는다고 했다. 유배인도, 노비도, 도적도 오라 하였다. 오면 죄를 지운다 하였다.
누군가 웃었다. 웃음이 오래가지 않았다.
"평생 쫓던 놈들을 이제 와서 부르는구먼."
"부를 사람이 없으니 부르지."
배쇠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는 그 부름의 대상이었다.
삼십 년을 도망친 사람에게 오라고 하는 종이가 있다는 것을, 그는 그날 처음 알았다.
배로 돌아왔을 때 선비가 그의 얼굴을 보고 먼저 물었다.
"무슨 일이오."
배쇠가 들은 것을 그대로 옮겼다. 짧게 옮겼다. 옮기는 데 오래 걸리지 않았다.
선비가 한참 말이 없다가 물었다.
"이 글은 어찌하오."
배쇠는 답을 오래 생각하지 않았다.
"이 글은 십 년을 기다렸소."
"십 년을 기다린 것은 하루를 더 기다리오."
"그러나 저 고개를 넘어오는 사람들은 오늘 밤을 못 기다리오."
선비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늙은 어부도 아무 말 하지 않았다.
그것이 그 두 사람을 본 마지막이었다.
돛줄을 풀었다.
흰 돛이 천천히 내려앉았다. 검게 물들여 다니던 그 돛이었다. 드러내려고 희게 올렸던 그 돛이었다. 오늘은 그냥 접었다.
배는 두고 갔다. 북쪽은 걸어서 가는 곳이었다.
부두에서 북쪽 길로 올라섰다. 평생 물에서 살았는데 발이 땅을 밟으니 어색하였다.
그래도 걸었다.
길에는 두 줄이 있었다. 남으로 내려오는 줄과 북으로 올라가는 줄이었다. 내려오는 사람들은 짐을 지고 있었고 올라가는 사람들은 아무것도 지지 않았다.
지고 갈 것이 있는 사람은 남으로 가고, 없는 사람은 북으로 갔다.
사흘째 되는 마을에서 교지를 읽는 것을 보았다.
관원이 상 위에 올라섰다. 목소리가 젊었다. 사람들이 모였는데 아무도 앞에 서지 않았다.
"어명이오."
죄인의 자손, 유배인, 노비, 도적. 싸울 수 있는 자는 죄를 묻지 아니한다. 나라가 그 죄를 지우노라.
읽기가 끝나고 한참 아무도 움직이지 않았다.
그러다 뒤쪽에서 한 사람이 걸어나왔다. 늙은 축이었다. 그다음에 둘이 나왔다. 그다음에는 세는 것을 그만두었다.
배쇠는 마지막에 나왔다. 그가 나올 때 관원이 이름을 물었다.
"없소."
관원이 붓을 들었다가 놓았다. 그리고 그냥 고개를 끄덕였다. 그날은 이름 없는 자가 여럿이었다.
북쪽 국경 마을에 대장간이 하나 있었다.
사십 년을 그 자리에 서 있던 대장장이가 사흘째 불을 끄지 않고 있었다. 풀무가 사람 대신 숨을 쉬었다.
마을에서 실어온 것들이 마당에 쌓였다.
저것이 무엇이냐고 그는 묻지 않았다. 쇠면 되었다.
관아에서 죄인의 사슬이 왔다. 누구를 묶었던 것인지 그는 몰랐다. 어느 집에서 밥 짓던 솥이 왔다. 어느 선비의 붓대에 박혀 있던 쇠도 왔다. 그것은 작아서 화살촉이 되었다.
원래 셋이 있었다. 조수 둘과 풀무를 밟던 아이 하나가 있었다. 셋 다 먼저 북으로 갔다.
그래서 그는 혼자 두드렸다.
나흘째 되는 날 절에서 종이 왔다.
백 년을 울던 종이었다. 수레 하나가 다 찼다. 깨어서 온 것이 아니라 깨서 온 것이었다. 누군가 산에서 이미 조각을 내어 실었다.
스님이 함께 왔다. 아무 말 없이 두고 갔다. 대장장이도 묻지 않았다.
조각 하나에 비천상이 반쯤 남아 있었다. 하늘을 나는 사람이 허리에서 잘려 있었다.
그것을 화덕에 넣을 때 대장장이는 잠깐 손을 멈추었다.
그리고 넣었다.
쇠는 기억한다. 녹여도 기억한다.
칼이 되어도 그 안에 종이 있다.
같은 겨울, 전라도의 한 마을에 낯선 사람이 왔다.
바다에서 왔다고 했다. 산에 있는 여인이 보냈다고 했다. 그 여인이 말하기를, 이 마을에 글을 아는 여자가 있다 하였다고.
분이는 그때 마흔넷이었다. 서른부터 아이들에게 글자를 가르쳤고, 마흔이 넘어 이 마을 훈장이 되었다. 마루 밑에서 종이를 찾은 것이 스물여덟 해 전이었다.
낯선 사람이 젖은 장부 한 벌을 두고 갔다. 소금에 반이 먹혔다고 했다. 거짓 증언을 산 자들의 이름이라 하였다.
그리고 그 사람은 다음 날 북으로 갔다.
분이는 사흘을 읽었다.
사흘째 되는 밤에 그녀는 장부를 덮었다.
이름은 다 읽었다. 소금이 지운 자리도 세었다. 스물세 군데였고 그중 열한 군데가 이름이 있던 자리였다.
그리고 알았다.
이 이름들은 이미 늦었다.
이것을 지금 세상에 내면 어찌 되는가. 세상은 지금 다른 이름을 부르고 있었다. 북쪽에서 온 것이 성 셋을 사흘에 무너뜨렸고, 고개마다 사람이 내려오고 있었다.
십 년 전에 누가 무엇을 샀는지는, 오늘 아무도 묻지 않는다.
그녀는 장부를 다시 기름천에 쌌다. 그리고 마루 밑에 넣었다. 스물여덟 해 전에 종이가 있던 그 자리였다.
언젠가 누가 또 찾을 것이다.
다음 날 아침 그녀는 종이와 먹을 챙겼다.
마을 사람들이 물었다. 쉰이 가까운 여자가 전장에 무엇 하러 가느냐고.
"쓰러 가오."
"무엇을 쓰겠소."
"죽는 사람의 이름을, 죽는 날에 쓰겠소."
아무도 더 묻지 않았다.
그녀가 아는 것은 두 가지였다. 하나는 사람을 돌보는 일이었다. 마을에서 아이를 받고 상처를 싸매고 죽는 사람 곁에 앉는 일을 이십 년 하였다. 다른 하나는 글이었다.
북쪽에는 그 둘이 다 필요했다. 그리고 그 둘을 다 가진 사람은 드물었다.
첫 장에 무어라 적을까 하다가 그냥 날짜를 적었다. 그 아래 한 줄을 비워두었다.
비워둔 줄은 아직 살아 있는 사람의 자리다.
눈이 오고 있었다. 먹이 얼지 않게 품에 넣고 걸었다.
그해 겨울, 고개마다 불이 올랐다. 봉수가 아니라 사람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