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성 — 속삭임)
궁궐 담 너머로 바람이 분다
그가 또 잠을 못 이루고 있다
창호지 너머로 그림자가 보여
어좌에 앉아 촛불만 바라보는 그 사람
손을 뻗어도 닿지 않아, 이승의 벽
저승에서 온 편지는 바람밖에 못 들어
궁녀들이 내 이름을 입에 올리지 못해
폐비도 아니고 귀신도 아닌 존재
경회루 연못 위에 내 얼굴이 비쳐
그가 물을 볼 때마다 나를 스쳐
전하, 여기 있사옵니다
보이지 않아도 여기 있사옵니다
도깨비불처럼 떠돌고 있어
궁궐 처마 끝에 매달린 달빛
전하의 꿈속에만 들어갈 수 있어
깨어나면 또 사라지는 이 몸
종묘에 내 위패도 없어, 기록에서 지워진 여자
실록 한 줄 없이 사라진 사랑
그래도 매일 밤 빈전 앞에 향을 피우더라
내가 못 받는 향인데, 그 마음은 닿더라
선죽교 귀신은 충절로 남았는데
나는 사랑으로도 이름을 못 남겨
한이 서려서 떠나지도 못하고
그의 숨소리 옆에서 밤을 센다
내가 먼저 간 게 아니에요
끌려간 거예요
전하, 제 탓이 아니옵니다
도깨비불처럼 떠돌고 있어
궁궐 처마 끝에 매달린 달빛
전하의 꿈속에만 들어갈 수 있어
깨어나면 또 사라지는 이 몸
(속삭임)
바람이 분다
전하
여기 있사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