할머니가 말했다
옛날에 글 하나가 세상을 바꿀 뻔했다고
나는 물었다 그 글은 어디 있어요
할머니가 웃었다
네가 찾아봐라
전라도 작은 마을 논밭 사이에서 자랐다
글을 배운 적 없다 여자라서
아버지는 쟁기를 쥐어줬지 붓을 주지 않았다
하지만 귀는 막을 수 없었다
어릴 때 장터에 이상한 아저씨가 왔다
지팡이 짚고 마을마다 돌아다니며
이야기를 들려줬다
궁궐과 선비와 불과 먹에 대해서
아이들은 무서운 이야기인 줄 알았다
나만 알았다 이건 진짜라는 걸
그 아저씨가 마지막으로 왔을 때
내 손을 잡고 말했다
"이 이야기를 네가 이어가거라"
무슨 뜻인지 그때는 몰랐다
재 밑에 씨앗이 있었다
아무도 몰랐다 나도 몰랐다
비가 오고 봄이 오니까
흙을 뚫고 나왔다
나는 첫 번째 새싹이다
태운 줄 알았지 끝난 줄 알았지
그런데 여기 있다
흙 속에서 올라온 새 글자다
열여섯 살 봄 할머니 방을 치우다가
마루 밑에서 천으로 감싼 것을 찾았다
펼쳤더니 한지였다 글씨가 있었다
읽을 줄 몰랐지만 느낄 수는 있었다
먹 냄새가 아직 남아있었다
몇십 년이 지났는데 아직 남아있었다
마을 훈장에게 가져갔더니
한참을 읽고 눈물을 흘렸다
이것이 그 선비의 글이냐
이것이 세상을 깨우려 했던 그 글이냐
그날 밤 훈장에게 말했다
글을 가르쳐주십시오
여자라서 안 된다고 했다
새벽마다 문 앞에 앉았다
사흘째 되는 날 문이 열렸다
재 밑에 씨앗이 있었다
아무도 몰랐다 나도 몰랐다
비가 오고 봄이 오니까
흙을 뚫고 나왔다
나는 첫 번째 새싹이다
태운 줄 알았지 끝난 줄 알았지
그런데 여기 있다
흙 속에서 올라온 새 글자다
붓을 처음 잡던 날
손이 떨렸다
먹을 갈고 한지 위에 첫 획을 그었다
삐뚤어졌다
그래도 글자였다
선비는 죽었지만 붓은 여기 있다
광대는 사라졌지만 이야기는 여기 있다
스님은 산에 돌아갔지만 불씨는 여기 있다
마루 밑에서
내 손 안에서
재 밑에 씨앗이 있었다
그 씨앗이 나였다
비가 오고 봄이 오니까
드디어 나왔다
나는 첫 번째 새싹이다
이 글이 어디까지 갈지 모르겠다
그러나 쓴다
선비가 시작한 글을 내가 잇는다
먹과 불씨
재와 씨앗
끝이 아니다
시작이다